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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 사람 사는 이야기 가득한 낙산 길 [도성 길을 산책하거나 서울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훌쩍 낙산에 올라가면 된다. 낙산 정상에 서면 옛 한성을 안쪽에서 둘러싸고

[걷고 싶은 길] 사람 사는 이야기 가득한 낙산 길

낙산 길 야경[사진/조보희 기자]

(서울=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한양도성 길 4개 구간 중 낙산 구간은 걷기에 가장 편안한 길이다. 해발 고도가 262∼342m에 이르는 백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구간은 약간의 등산 성격이지만, 높이가 125m에 불과한 낙산은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까워 오르는 데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낙산 구간은 약 3.2㎞로 거리도 제일 짧다.

◇ 언덕같이 야트막한 산

도성 길을 산책하거나 서울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훌쩍 낙산에 올라가면 된다. 낙산 정상에 서면 옛 한성을 안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뿐 아니라 외사산의 하나인 북한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내사산은 백악산, 인왕산, 목멱산, 낙산을 말한다. 백악과 인왕 사이로 떨어지는 일몰이 장관이고 도심 야경도 무척 아름답다.

한양도성의 시기별 다른 축성 형태를 볼 수 있는 성벽[사진/조보희 기자]

낙산 길은 혜화문∼낙산 정상∼흥인지문공원∼흥인지문∼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광희문으로 이어진다. 도성 문화관광 해설사들 사이에서 낙산은 '서울의 몽마르트르'로 불린다.

해발 130m인 몽마르트르와 낙산의 높이가 비슷한 데다 시민들이 낙산공원이나 흥인지문공원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프랑스 몽마르트르 언덕에 앉아 파리 시내를 감상하는 관광객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낙산을 걷는 여행자의 마음은 가볍고 상쾌하다. 성곽이 뿜어내는 예스러운 멋과 잘 정돈된 낙산공원의 단정함이 서울이라는 도시,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떠올리는 여행자의 마음을 여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 사람 사는 이야기 풍성한 길

낙산 길에서는 도성을 따라 생긴 성곽 마을들을 만날 수 있다. 삼선마을, 장수마을, 이화마을이다. 한국전쟁 후 낙산 일대에는 난민, 노동자, 도시 빈민들이 몰려들어 판자촌이 형성됐다.

성곽 마을들은 최근에 도시재생 사업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된 곳으로 평가된다. 주민 참여를 통해 성곽 마을의 특성을 보존하는 한편 노후 주거환경 개선, 기반시설 정비를 통해 물리, 사회, 경제적 재생을 도모했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 지나친 관광지화 현상이 나타나자 애써 그린 마을 벽화가 철거된 것은 아쉬움이다.

옹벽이 있는 흥인지문[사진/조보희 기자]

낙산 일대의 창신동은 1960∼1970년대 한국경제를 이끄는 수출 견인차였던 의류산업의 거대한 제조 거점이었다. 종업원 1∼3명의 소규모 의류 공장이 한때는 3천 개를 넘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꽃다운 청춘을 보낸 어린 여공들의 애환, 이들의 인권 보호를 환기한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생생한 곳이다.

흥인지문공원은 동대문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있던 자리다. 병원의 전신은 중구 정동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녀관'이다.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빈민 지역인 이곳이야말로 병원이 필요하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이곳으로 보구녀관을 이전했다.

이화동 마을박물관[사진/조보희 기자]

낙산 자락은 18세에 홀로 된 단종비 정순왕후가 비운의 삶을 이어간 곳이기도 하다.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도움을 거부하고 궁핍한 생활을 이어간 정순왕후를 기리는 비석이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에 남아있다.

◇ 역사에서 배우다…영감과 통찰을 주는 유적

혜화문을 기억하는 서울 시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대로에 비켜난 언덕에 서 있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숙정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는 작은 문(小門)인 혜화문은 사대문(大門) 중 하나인 숙정문보다 이용자가 많았으나 일제 강점기에 돈암동에 전차선이 놓이면서 헐렸다.

낙산 구간의 출발점인 혜화문[사진/조보희 기자]

1994년 복원할 때 제자리를 찾지 못한 탓에 혜화문은 역사의 우여곡절과 서민의 희로애락이 서린 곳임에도 존재감이 크지 않다.

조선 시대 명나라 사신들은 사대문으로 드나들었으나 만주의 여진족 사신은 오랑캐로 취급받아 작은 혜화문으로 출입했다.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조선이 청나라에 패한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신은 소문이 아닌 사대문으로 왕래했다. 혜화문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짧았던 외교적 안목을 되돌아보게 한다.

성곽길을 오르다 장수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빠지면 삼군부 총무당 건물을 만난다. 흥선대원군은 부패 권력 기구로 변질한 비변사를 해체하고 총무당, 청헌당, 덕의당으로 구성된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인적 드문 곳에 쓸쓸히 서 있는 총무당은 대원군이 이루지 못한 부국강병의 꿈을 대변하는 듯하다.

삼군부 총무당 건물[사진/조보희 기자]

흔히 동대문으로 부르는 흥인문은 숭례문처럼 문루가 2층이다. 문 앞에 옹벽을 쌓아 이중 방어시설을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낮은 낙산의 취약한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옹벽 구조는 도성 진입을 시도하는 적을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든다. 흥인문의 튼튼하고 흥미로운 구조는 약간 높은 지대인 흥인지문공원에서 잘 보인다.

한양도성에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사대문과 사소문 외에 도성 안 물을 모아 내보내는 수문이 둘 있었다. 청계천이 흘러나가는 오간수문과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빠져나가는 이간수문이다.

대부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한반도 하천과 달리 청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서울은 북서쪽 지대가 높고, 동남쪽 지대가 낮기 때문이다. 1907년 헐린 오간수문은 현재 청계천 변에 재현돼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조성하면서 발견된 이간수문[사진/조보희 기자]

이간수문은 동대문운동장을 없애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지을 때 발굴됐다. 벽초 홍명희가 쓴 '임꺽정'에는 꺽정 일당이 관군을 피해 한양에서 달아날 때 오간수문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대목이 있다.

역사를 배우지 말고 역사에서 배우라고 했다. 역사는 현대인에게 어떤 통찰과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유적 체험과 여행은 그 답을 알려줄지 모른다.

◇ 현대에 되살아나는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전쟁을 목적으로 쌓은 군사 요새가 아니다. 조선 왕조를 상징하고 한성부의 도시공간을 관리하는 동시에 적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려고 쌓은 도시 성곽이다. 북한산과 한강 사이에 자리한 한양은 예부터 명당으로 꼽혔다.

백두대간 중반부에서 지맥이 갈라져 서쪽으로 치닫다 우뚝 솟은 것이 북한산이다. 그 남쪽 지맥이 백악으로 이어졌다.

한국인들은 고대부터 산의 능선에 성을 쌓는 축성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한국을 '산성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다.

성 밖 길을 걸으며 시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사진/조보희 기자]

한양도성은 이를 계승해 자연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성의 위엄과 효율을 높였다. 외곽선이 자연 능선을 따라 결정됐기 때문에 내부의 도시 구조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다.

한양도성 4개 구간을 '이매진'(imazine)은 모두 탐방했다. 지나간 날을 다가올 날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는 시간 여행자들은 총 18.6㎞에 달하는 4개 구간을 하루에 다 걷기도 한다.

도성의 가치는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틀림없는 것은 탐방하는 시민이 많을수록 그 가치와 존재감이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ㅡ[연합뉴스]ㅡ2022.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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