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화제가 된 소극장 뮤지컬 '판'(연출 변정주)이 무대 위에 올랐다. 조선 이야기꾼의 삶을 다루며 세태를 풍자한 판은 신인 정은영 작가와 박윤솔 작곡가가 만든 작품으로 CJ문화재단의 제작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판'은 19세기 말 조선을 배경으로 양반가 자제가 조선 최고 이야기꾼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과거시험 준비는 뒷전인 채 매일 저잣거리나 돌아다니는 철부지 도령이 주인공 달수다. 어느 날 달수는 책방인 세책가 앞에서 아리따운 여인 '이덕'을 만나 한눈에 반하고, 무작정 그녀를 쫓아가다 이야기를 판다는 '매설방'에 도착하게 된다. [공읽남] 뮤지컬 '판'…웃음 속에 칼을 감추다 [통통영상]
매설방에는 조선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희대의 재담꾼 '호태'의 이야기가 한창이다. 호태의 매혹적인 이야기에 빠진 달수는 우여곡절 끝에 그의 제자가 되고, 본격적인 '낭독의 기술'을 전수하게 된다.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을 꿈꾸는 양반가 도령의 앞날에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남사당놀이 같은 우리 전통 연희 패들이 뮤지컬 무대에 난입했다. 작품은 전통 연희를 바탕으로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곁들여 신명 나고 흥겨운 무대를 선사한다. 꼭두각시놀음, 인형극 등 재담꾼의 이야기판에서는 풍자와 해학이 넘쳐난다.
겉으로 드러나는 웃음과 신명 뒤에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유기전을 가장한 매설방은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 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있는 해학으로 민초를 위로한다. 민초들은 매설방에서 펼쳐지는 재담에 웃고 울며 살아야 할 의미와 희망을 키워간다. 그런 의미에서 매설방은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곳일지도 모른다.
작품은 비선 실세를 둔 '사또'를 통해 현시대의 문제점을 꼬집기도 한다. 사또는 세상을 풍자하는 패관소설이 떠돌자 이를 검열해 불태우기도 하고, 퇴임 후 자신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장사치들로부터 후원금을 강탈하는 등 포악질을 해댄다. 사또는 또 이를 풍자하는 달수와 호태를 옥에 가두고 핍박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에 동조된 백성들이 들이닥쳐 관아를 허물어버린다. 절대 권력에 맞선 약자들의 반격, 일종의 민중봉기다. 누가 봐도 문화예술계 검열과 블랙리스트 사태, 그리고 지난겨울부터 광화문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비단 이뿐이랴, 쌀값을 올려달라고 애원하던 농부는 곤장을 맞아 죽고, 몇 년간 등골이 휘도록 일해 온 소작농은 다리를 다쳤다는 이유로 지주에게 쫓겨난다. 입만 있고 귀는 없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겪는 아픔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나리오를 쓴 정은영 작가는 "뮤지컬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소재를 찾아보던 중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 '전기수'를 알게 됐고 이들의 직업적 특성에 매료돼 이야기를 썼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의 이야기에는 불가능한 사랑, 신분 차이, 불합리한 제도와 편견까지 전복할 힘이 있다"면서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현실을 버티고 살아가게 하는 이야기의 좋은 면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날 선 풍자와 해학으로 시종일관 웃음을 선사하는 배우들의 연기력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에 맞춰 펼쳐지는 신명 나는 춤사위는 잔치판을 연상케 한다. 조선 최고의 입담을 자랑하는 전기수 '호태' 역에는 배우 김지훈, 김대곤이 출연한다. 철부지 도령 달수 역에 유제윤, 김지철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이밖에 최유하, 박란주, 윤진영, 임소라 등이 출연한다. 작품은 오는 4월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CJ아지트 대학로에서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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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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