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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그곳] 대지에서 피어난 할매들의 詩心
'시인 할매'들이 사는 곡성 서봉마을

(곡성=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차를 세우고 걸었다. 꽃샘추위라고 하지만 그래도 봄인데… 가는 길에 누군가 만날지도 모른다. 신작로 양쪽엔 밭고랑이 벌써 푸릇푸릇 고개를 내민다. 밭에 할매들이 없는 걸 보니 아직 농사일이 바쁠 때는 아닌가 보다. 백여 걸음이나 옮겼을까, 누가 봐도 농가라고 보기엔 특이한, 하얀색 담벼락이 나타났다. 푸른 하늘 밑에 새하얀 담장이라니. 어쨌든 제대로 찾았다. '길작은 도서관'

전남 곡성 서봉마을. 가는 곳마다 골목 담벼락에 할매들의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

전남 곡성 서봉마을. 가는 곳마다 골목 담벼락에 할매들의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

동화의 나라 출입구 같다. 벽에 그려진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검은색 실물 고무신이 주렁주렁 걸렸다. 바로 옆 흰 벽에 쓰인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잘 견뎠다' 첫눈에 봐도 심상치 않다. 뭘 견뎠다는 걸까.

사박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 윤금순 '눈' 전문

어디서 본 듯해서 얼른 시집을 꺼내 뒤졌다. '눈'이라는 시를 찾아냈다.

나이 여든을 넘긴 할매의 마음에도 하얀 눈은 시를 불러온 모양이다. 그런데 시엔 '장독에, 지붕에, 머리 위에 떨어지는 눈'을 보는 동심만 있는 게 아니다.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슬픔도, 고통도, 회한도, 내리는 눈을 보는 순간만큼은 새봄 눈처럼 스르르 녹아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모여 공부하고 시를 쓰는 '길작은 도서관' [사진/권혁창 기자]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모여 공부하고 시를 쓰는 '길작은 도서관' [사진/권혁창 기자]

전남 곡성군 입면 서봉마을. '쬐그만' 시골 마을에 농사짓고 사는 할매들이 일을 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평생을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할매들이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는 내쳐 시집까지 냈다. 제목은 '시집살이 詩집살이'(북극곰, 2016). 그리고 이번엔 할매들의 시 쓰기를 다룬 영화까지 나왔으니, 일을 냈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니다.

영화 '시인 할매'(연출 이종은)는 소박한 시골마을의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마을 '길작은 도서관'에서 한글을 배운 할매들이 서툴지만 아름다운 시를 써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김선자 도서관장은 도서관에서 할머니들이 책을 거꾸로 꽂는 것을 보고 2009년 한글교실을 열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영화 '시인 할매' 스틸컷. 곡성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마을 도서관에서 시를 쓰고 있다.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영화 '시인 할매' 스틸컷. 곡성 서봉마을 할머니들이 마을 도서관에서 시를 쓰고 있다.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할매들은 어린 자식이 글자를 물어올 때 가장 애가 탔다고 한다. "니 아부지 오면 물어봐라"고 했더니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을 때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윤금순 할머니는 이런 글을 쓴다. "전기세 같은 종이가 나오면 볼 수 없었다/ 지금은 간판도 보고 차 번호도 본다/ 남편이 군대 갔을 때는 편지도 쓰고 싶었다/ 받아 볼 수만 있다면/ 천국에 있는 남편에게 쓰고 싶다/ 나 잘 살고 있다고."

글을 깨친 할매들은 철 지난 달력 뒷장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삐뚤삐뚤, 맞춤법도 무시하지만, 할매들의 시엔 삿됨도, 관념도, 권력도 없다. 대지에 맨발 딛고 흙에 살갗 부비며 산 나날의 흔적이 날것 그대로의 진심을 전해올 뿐이다.

할매들의 시 쓰기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할매들의 시 쓰기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서봉마을은 곡성 동악산(735m) 자락 밑에 똬리를 튼 작은 마을이다.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마을 북쪽에 흐르고, 동네 어귀엔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보이느니 산과 논과 밭과 온갖 푸성귀들이 몇 안 되는 인가(人家)를 둘러친 심심산골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이 길을 울며 들어왔다던 김점순 할머니가 떠올랐다.

열 아홉에 시집왔제

눈이 많이 온 길을

얼룩덜룩 꽃가마를 타고

울다가 눈물개다

울다가 눈물개다

서봉 문 앞에까장 왔제

고개를 숙이고 부끄라서

벌벌 떨었어

- 김점순 '시집1' 부분

서봉마을 주민들의 쉼터인 한벽정(寒壁亭) [사진/권혁창 기자]

서봉마을 주민들의 쉼터인 한벽정(寒壁亭) [사진/권혁창 기자]

할매들은 평생 고된 시집살이가 한(恨)으로 남는다.

"시월 그뭄날에 시집와서/ 섣달에 친정 간디/ 맘 설레고 좋았는디/ 삼 일만 있다가 오라네"(김점순,'시집2')

"아침에는 수박 순 치고/ 저녁에는 수박 약 하고/ 안태고랑 밑에서 해 너머까지 일하고 오면/ 늦게사 밥한다고/ 꼬라지 내고 징했다/ 기어나가면 오갈 데는 없고/ 애들 데리고 나갈라 해도/ 누가 나를 오라고 해/ 그래 참고 살았다"(안기임, '남편2')

이쯤 되면 시집살이가 감당해야 할 노동은 중대한 근로기준법 위반이요, 노동조건은 지옥이 따로 없지만, 할매들은 그게 삶이거니 피눈물을 감추고 그저 씩 웃고 살았다.

날숨 쉬듯 설움도 날아가겠지, 미운 정도 정이겠지, 하여 세월을 죽여왔는데, 이제 살만하니 남편은 죽고 없다.

"니 설움 들어가거라/ 내 설움 나간다"(양양금, '시집살이')

"나 안글 자리도 없어/ 남의 작은 방에 가 갔고/ 인자 살만한께 가브네.(김막동, '남편2')

서봉마을 풍경 [사진/권혁창 기자]

서봉마을 풍경 [사진/권혁창 기자]

먹고살기 힘든 시절을 보낸 할매들. 가난도 시집살이 못지않은 고통이다. 땅의 가치를 빼앗긴 농사꾼은 종일 죽도록 일해도 돌아오는 건 돈 몇푼, 자본이 인간 위에 올라선 시대. 그래도 할매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겨내는 법을 터득했다.

"젖 떨어진 동생에게 준/ 흰 밥이/ 어찌 맛나 보여 먹고 잡던지."(박점례, '가난')

"소금에 국을 끓여도/ 그리도 맛나."(조남순, '가난')

"밤새 눈이 와/ 발이 꽉 묶여버려/ 오도가도 못하것네/ 어쩔까/ 이 눈이 쌀이라믄 좋것네."(박점례, '겨울2')

동생 먹이느라 흰 밥은 먹지도 못하고, 그래서 할매들은 국에 소금만 넣고 끓였는데, 그게 "그리도 맛"난다고 한다. 밤새 내리는 눈이 쌀이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보는 게 할매들이 차린 욕심이다.

서봉마을 담벼락에 붙어있는 할머니들의 시와 그림 [사진/권혁창 기자]

서봉마을 담벼락에 붙어있는 할머니들의 시와 그림 [사진/권혁창 기자]

마을을 돌아봤다. 가는 곳마다 담벼락엔 온통 시와 그림이다. 이 골목, 저 골목. 노랑, 빨강, 초록… 색색이 어우러진 할매들의 글과 그림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미소가 절로 나온다. 흙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3월의 온기는 투명한 햇살과 기분 좋게 만난다. 어딜 가도 봄세상이다.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한벽정(寒壁亭)이라는 쉼터에 오르니 마을이 한눈에 잡힌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야트막한 언덕배기와 숲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언덕 위엔 소나무 두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다.

소나무 너머가 궁금했다. 코발트색 하늘과 흰 구름 밑. 그에 걸맞은 뭔가를 기대하며 반대편 언덕에 올랐다. 거긴 비탈진 밭이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공장이 보인다.

타이어 공장이

전부

우리네들 밭이었어

몸통만 한 미류나무들이

들어서 있던

손바닥만 한 그늘땜시

땀도 씻고

남원댁네랑 막걸리도 쪼르륵

딸아 마셨는디

그 맛이 안 나.

- 김점순 '변화' 전문

마을 끄트머리 언덕배기에 있는 소나무 [사진/권혁창 기자]

마을 끄트머리 언덕배기에 있는 소나무 [사진/권혁창 기자]

할매들의 시엔 '학문'으로는 도저히 깨치기 힘든 '생태주의'의 진면목이 숨겨져 있다. 편한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할매들은 오감으로 체득했다. 힘들어도 그때가 좋았다는 것을.

"시방은/ 새도 없어/ 옛날엔 나락이 필 때 되면 새떼가/ 나락 빨아먹어븐께/ 어찌나/ 힘들었는지 몰라/ 시방은 새도 안 보이는디/ 그때가 더 좋았지 싶어."(도귀례, '새떼')

마을 북쪽 어귀를 돌아 나오는데 김점순 할머니를 만났다. 사진을 찍고 몇 마디 나누는데, 시 잘 쓰셨다는 말에 "거 뭐 필요도 없는걸…"하시며 멋쩍게 웃는다.

3월 말부터는 농사일이 바빠지는데 다른 시인 할매들은 다들 밭에서 퇴비를 주거나 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할매들은 언제까지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서봉마을은 80가구에 100명 정도가 사는데 할매 1인가족이 대다수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사라진 농촌 마을. 할매들은 갈수록 늙어가고. 농사는 어떻게 해야할까. 윤금순 할머니의 시는 그 우문에 다음과 같은 현답을 내놓는다.

선산이 거기 있고

영감도 아들도 다 거가 있은게

고구마라도 캐서 끌고 와야한디

감나무까지 다 감아 올라간 칡넝쿨도

낫으로 탁탁 쳐내야 한디

내년엔 농사를 질란가 안 질란가

몸땡이가 모르겄다고 하네.

- 윤금순 '선산이 거기 있고' 부분

마을에서 만난 김점순 할머니. 본인이 쓴 시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해 주셨다. [사진/권혁창 기자]

마을에서 만난 김점순 할머니. 본인이 쓴 시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해 주셨다. [사진/권혁창 기자]

※ 이 글에 실린 시(詩)들 중 서봉마을 벽에 붙은 작품과
영화 '시인할매'에 나온 것 외에 일부는 시집 '시집살이 詩집살이'(북극곰, 2016)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faith@yna.co.kr

<연합뉴스> 2019/04/10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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