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독일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1877~1962).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탁월한 서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1912년 2월, 중국의 한 기담집을 읽고 한 매체에 이런 감상평을 적었다.
"마치 꿈에서처럼 여기서도 유령들, 죽은 이들, 현실과 믿음의 모습들이 돌아다니고, 가능한 것과 소망스러운 것, 달콤한 것과 두려운 것이 고요한 어스름 빛 속에 손에 손을 잡고 나타난다. 일부는 윤곽도 없이 어둠 속으로 스러지고, 일부는 표현을 통해 상징으로 올라선다. 매일 밤 이런 꿈들을 꾸고 싶고, 해마다 이런 종류의 책을 한 권씩 새로 받고 싶다."
그가 감탄해 마지않은 작품은 중국 청나라 때 포송령이 쓴 '요재지이'(聊齋志異)다. 1980~90년대 어린 청춘들의 심장을 훔쳤던 홍콩 영화 '천녀유혼'도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영화에서처럼 이 책에선 인간과 귀신의 세계가 스미고 섞인다.
요재지이를 읽은 헤세는 "우리 서양인들은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설명하거나 흉내 낼 수 없다. 정말로 섬세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다"라며 한계를 인정하는 듯한 글을 적었다. 헤세가 서평을 쓴 후 100년이 조금 더 지났다. 그리고 프랑스 거장 안무가 앙줄랭 프렐조카주가 야심차게 요재지이의 해석에 도전했다.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국내 첫선을 보인 프렐조카주의 '프레스코화'(원제: La Fresque)는 요재지이에 수록된 단편을 토대로 한 현대무용이다.
'프레스코화'
두 남자의 2인무로 시작하는 이 기이한 작품에서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프렐조카주는 요재지이에서 오래된 절을 방문한 한 남자가 벽화를 보고 매료되고, 그 세계에 빨려 들어가 벽화 속 머리카락이 긴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정도의 기본적인 스토리만 차용했기 때문이다.
남성 2인무를 비롯한 남성들의 춤이 끝나고 나면 5명의 여성 무용수가 등장한다. 그들이 앉아있는 모습은 우아하고, 자태는 신비롭다. 앉아있는 자세만으로도 마음의 격동을 끌어내는 이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은 아름답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도도하면서도 에로틱하며 권태로움까지 담겨 있는 여성 무용수들의 등장은 이 극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발라드 장르의 사랑 이야기지만 '프레스코화'에는 '라르고'의 느린 움직임보다는 '프레스코'의 격렬한 움직임이 많다. 무용수들은 격한 날숨을 내뱉으며 너른 무대를 뛰어다닌다. 전체 출연자 수가 10명에 불과하지만, 무대가 꽉 차는 느낌을 받는 이유다. 조명도 효과적인데, 심플한 무대 디자인에 컬러풀한 조명은 눈길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가끔 지나치게 강렬한 조명이 동공을 자극해 눈에 부담을 주기는 한다.)
다섯 여성이 펼치는 머리카락 군무는 신선하다. 프렐조카주는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머리카락은 이 극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했는데, 앞뒤, 좌우로 나부끼는 머리카락 속에는 신기하게도 춤추는 이들의 고통이 스며있고, 어떤 지점에선 그 고통에서 벗어난 자유로움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프레스코화'[LG아트센터 제공]
이야기보다는 상징으로 점철된 작품이어서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은 무용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읽는 건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가슴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 만만찮은 현대무용은 시와 닮아 있는 작품이고, 그래서 무용수들의 발끝과 손끝, 머리카락 끝에 깃든 감정의 움직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런 디테일한 부분에서 상당한 만족을 준다.
프레스코화에서 어쨌든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남는다. 흔한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1시간 20분간 휘몰아친 격정적 감정은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줄 것 같다. 사랑 뒤에 남겨진 감정, 상처에서 솟아나는 피처럼 흐르는 이 감정의 잔여물은 언제쯤 응고될 것인가.
이번 작품은 11월 1~3일 서울(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후 부산(6일.부산문화회관)과 대전(9일.대전예술의전당)에서도 상영된다.
'프레스코화'[LG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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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2019/11/02 12:42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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