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은행 정책 안 먹혀… 정치 불안까지 야기 
ECB(유럽중앙은행)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ECB(유럽중앙은행). ECB의 공격적인 금융완화 정책은 유럽 국가들이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DPA_연합뉴스 글로벌 경기 둔화는 2019년 경제와 관련된 압도적 전망이었다. 올해 1~3월 실제로 발표됐던 경제 지표는 이런 전망의 현실화 가능성을 높여줬다.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경기 둔화 조짐이 뚜렷하다. 다만 지역·국가별로 온도 차는 있다. 지난 수년간 가장 경기가 좋았던 미국은 큰 틀에서 경기 하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도는 예상보다 완만하다. 중국 경제의 성장세는 빠르게 둔화하고 있다. 소비와 투자, 수출 모두 전 방위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이런 급하강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경기 부양책을 불러왔다. 인민은행의 지급준비율 인하, 2·3선 도시 부동산에 대한 규제 완화, 자동차·가전 구입 시 보조금 지급 등 여러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올해 들어 중국 증시가 글로벌 주요 증시 중 가장 탄력적으로 오른 이유도 정책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결과다. 미국과 중국에 비하면 유럽 경제의 흐름이 가장 나쁘다. EU 집행위원회가 올해 2월 2019년 유로존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전망치를 1.3%로 하향 조정한 데 이어, 3월에는 IMF(국제통화기금)가 1.1%까지 성장률 전망치를 낮췄다. 이 정도라면 '늙은 대륙' 유럽의 실력에 맞는 성장률로 볼 수 있지만 걱정스러운 점은 성장 전망치의 하향 조정 속도가 가파르다는 점이다. 작년 8월 경제 전문가들이 추정했던 2019년 유로존 성장률 예상치는 2%에 달했는데, 이런 전망치가 불과 6개월여 만에 1%대 초반까지 낮춰졌다. 성장률 둔화도 문제지만 처방이 마땅치 않다는 게 더 걱정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국가의 연합체인 유로존에서 모두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도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재정 정책의 합의가 매우 힘들다. 유럽의회가 있긴 하지만 완성도 높은 정치적 통합체로 보기 어렵다. 유로존은 기본적으로 개별 국가의 국민들이 투표로 선택한 정부들로 구성돼 있다. 유로존 출범 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회원국들의 재정 적자를 GDP의 3% 이내로 제한하는 등 일부 규율을 세웠지만 매우 느슨하고 구속력도 약하다. 2010~2012년 PIIGS(포르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의 재정 위기 국면에서 우리는 모든 국가로부터 환영받는 정책의 합의점을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소방수'로 나선 것은 ECB(유럽중앙은행)였다. 재정 정책에서 공감대 형성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통화정책을 쓸 수 있는 독립적 중앙은행은 존재했기에 ECB의 공격적인 금융완화 정책은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에도 이탈리아의 재정 적자 확대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지속되지만 ECB의 대응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당초 ECB는 2019년 중 기준금리를 올리는 긴축에 첫발을 내디딜 것으로 관측됐지만 경제지표가 악화되자 빠르게 정책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ECB의 연내 금리 인상은 물 건너가는 분위기고, 오히려 새로운 장기대출 프로그램(LTRO)을 도입하고 있다. 유로존의 급격한 경기 둔화를 감안하면 ECB가 적절한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도이치방크의 주가 하락 추이신영증권 제공 문제는 ECB가 추가 완화 정책을 쓰더라도 그 효과가 얼마나 나타날지 미지수라는 점이다. 이미 유로존 주요국 금리는 매우 낮은 수준까지 떨어져 있기 때문에 통화정책 측면에서 추가 자극이 가해져도 큰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의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0.04%(3월 21일)에 불과하다. 만기가 10년인 장기금리가 거의 제로 수준이다. 금리가 제로까지 하락하는 과정에서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이런 경제는 사실상 유동성의 함정에 빠졌다고 봐야 한다. 이런 상황에선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효과를 보기 힘들다. 독일에선 오히려 저금리의 후유증이 나타나는 중이다. 독일의 대표 은행인 도이치방크의 주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낮은 수준까지 하락했다. 은행의 기본적인 수익원은 예대마진인데, 금리가 극단적으로 낮아지다 보니 대출을 통해 돈을 벌기 어렵다. 만성적 저금리에 따른 손익 악화가 주가의 장기 하락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저금리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경제에서는 중앙은행의 정책이 위기 탈출의 돌파구가 되기 어렵다. 한편, 유로존의 경기 하강이 깊어지면 또다시 정치 불안이 커질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우리는 재정 위기라는 외피를 쓰고 나타났던 유로존의 정치 불안을 목격한 바 있다. 유로존의 결속을 위협했던 정치 위기는 경기 후퇴의 산물이었다고 본다. 정치 불안 때문에 경기가 후퇴한 게 아니라, 경기 침체가 정치 불안을 불러왔다는 게 올바른 인과관계가 아닌가 싶다. 유럽연합과 같은 공동체의 결성은 번영의 산물이다. 지켜야 할 번영이 있을 때 국가 간 결속력은 높아진다. 유럽연합은 유럽 대륙을 폐허로 만들었던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화를 막아야 한다는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2차 대전 직후인 1951년 만들어진 ECSC(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군수물자로 전용될 수 있는 석탄과 철강을 통제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런 부분적 통합이 유럽연합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2차 대전 후 50년간 경험한 평화의 산물이었다. 전범 국가였던 독일이 통독을 이루자 독일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유럽연합의 결성 속도가 빨라졌다. 얼마 전 글로벌 금융시장을 긴장시킨 이탈리아의 정치 불안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작년부터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성장한 오성운동과 극우적 색채를 가진 극우동맹이 연정을 이뤄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의 정책에는 미디어 재벌로 이탈리아 총리를 3번이나 역임했던 베를루스코니가 본격화했던 포퓰리즘적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이민자 유입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반대하며 유럽 극우파 정당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탈리아 연정은 유럽연합 차원의 난민 수용정책을 재검토함과 동시에 급진적 이슬람 모의 및 모스크 폐쇄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프랑스 정부의 유류세 인상에 저항하는 '노란 조끼 시위'(사진)는 만성적 저성장 국면에서 경제적 자원배분을 둘러싼 갈등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EPA_연합뉴스 이탈리아 연정의 완고한 반이민 정책을 보면서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된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이탈리아에서의 반이민주의가 보여주는 역설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이탈리아 국민은 신대륙과 서유럽으로 이민을 많이 떠났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 이탈리아에서 특히 가난에 시달리던 나폴리와 시칠리아 등 남부인이 대거 신대륙으로 떠났다. 영화 '대부'는 미국 내 이탈리아 커뮤니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고,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일본 애니메이션 또한 20세기 초 선진국이었던 아르헨티나로 일하러 간 엄마를 찾아가는 나폴리 소년 마르코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서유럽으로 이주했던 이탈리아인들은 삼류 시민 취급을 받았는데, 1950년대 스위스 공원에 붙어 있었다는 '개와 이탈리아인은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이들의 애환을 잘 보여준다. 이런 이탈리아에서 배타적인 이민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포퓰리즘과 극단적 보수화 역시 성장 둔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유로존 내에서도 이탈리아의 성장 전망이 가장 비관적이다. 이탈리아의 GDP 성장률은 2018년 0.8%, 2019년 0.2%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프랑스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에 저항하는 '노란 조끼 시위' 역시 만성적 저성장 국면에서 경제적 자원배분을 둘러싼 갈등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먹고살 만해야 타자에 대한 관용도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유로존 성장 둔화는 정치 불안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유럽 리스크는 브렉시트와 관련된 불확실성에만 있는 게 아니다.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재정 위기의 일단락과 ECB의 양적완화로 몇 년간 조용했던 유로존이 재차 불안 요인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신영증권 제공 김학균 -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 sigo1@naver.com
<연합뉴스> 2019/03/31 10:30 송고 ㅡCopyright ⓒ OTOT - 오티오티 [신문] 무단전재 배포금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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