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장 대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고목이 우거진 정원이 펼쳐졌다. 가운데 연못이 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다.
800평 정원에 심어진 나무는 모두 40여종. 멋지게 줄기를 뻗은 중앙의 배롱나무(백일홍)는 무려 700년 된 고목이다.
2월 초 뒤늦은 한파에 움츠러든 봄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전이었지만, 목련과 영산홍, 백일홍, 석류꽃 등 갖가지 꽃이 철마다 정원을 장식한다고 한다.
해창주조장은 정원이 아름다운 양조장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 정원과 살림집이 조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해남에 정착해 살던 일본인 미곡상 시마다 히코헤이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정종을 빚었다고 한다.
정원 곳곳에는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원 한구석 나무 아래 놓인 비석은 이곳이 제물포 조약 당시 조선 대표였던 백파 신헌구(1823∼1902) 선생이 살던 집터였음을 보여준다.
암행어사로 5년간 해남에 머물렀던 그가 한양으로 떠나면서 전답을 마을에 주고 가자 주민들이 세운 공덕비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상흔도 남아 있다.
황국 신민 서사비는 13년 전 주조장을 인수한 오병인 씨가 정원을 복원하던 중 땅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1930년대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암송을 강요한 일종의 맹세문이다.
비석 옆 안내판에는 '한국과 일본 간에 있었던 뼈아픈 과거사를 삭여 놓은 생생한 역사적 유물을 다 같이 반성하고 참회하는 교육의 지표로 삼기 위해 마당에 보존, 전시한다'고 쓰여 있다.
주조장 옆에는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해 쌀을 보관했던 녹슨 창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사용된 미곡 창고 [사진/전수영 기자]](https://img4.yna.co.kr/etc/inner/KR/2020/02/17/AKR20200217152800805_04_i_P4.jpg)
일제강점기 사용된 미곡 창고 [사진/전수영 기자]
◇ 막걸리 애호가에서 술도가 주인으로
일제강점기 정미소였던 이곳에서 막걸리를 빚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다.
해방 뒤 해남 삼화초등학교 설립자인 장남문 씨가 이곳에 살았는데 주조장 면허는 그가 1961년 낸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강진에서 술을 빚던 황의권 씨가 주조장을 인수해 30년 넘게 술을 빚었다.
현재 주인인 오씨는 해창 막걸리를 택배로 주문해 즐겼던 해창주조장의 단골 손님이었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술도가 주인이 된 것은 40대 중반이었던 2008년. 전 주인 황씨가 자녀 가운데 주조장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 인수할 사람을 물색했고 오씨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막걸리를 좋아하기도 했고, 스트레스 많던 서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어요. 서울에서는 경쟁력이 없었거든요(웃음). 재미로 시작한 것이 본업이 됐네요."
주조장 마당에서는 커다란 통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 쪄낸 고두밥을 식히는 중이었다. 통을 가득 채운 고두밥은 유기농 찹쌀로 지은 밥이다.
멥쌀로 빚는 일반적인 막걸리와 달리 이곳에서는 멥쌀 20%, 찹쌀 80%의 비율로 밥을 지어 술을 빚는다. 막걸리의 풍미를 좋게 하기 위해서다. 아스파탐이나 설탕 등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았음에도 단맛이 도는 것은 찹쌀 덕분이다.
이렇게 쪄낸 고두밥을 온종일 식히고 나서 다음 날 술을 담근다. 뜨거운 고두밥을 바로 넣으면 누룩 속 미생물이 죽기 때문이다.
![담근 지 5일된 막걸리 [사진/전수영 기자]](https://img5.yna.co.kr/etc/inner/KR/2020/02/17/AKR20200217152800805_03_i_P4.jpg)
담근 지 5일된 막걸리 [사진/전수영 기자]
발효실 안에서는 담근 지 5일 된 술이 보글보글 기포를 내뿜고 있었다.
고두밥과 밀 누룩에 물만 더해 세 차례에 걸쳐 담근 술은 5일간 32도가량에서 발효시킨 뒤 18도에서 25일 더 발효시킨다.
5일 만에 생산되는 시중의 일반 막걸리와 달리 숙취가 없는 것은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고 한 달간 완전히 발효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30일간 숙성된 막걸리의 도수는 15도가량. 여기에 물을 더해 원하는 도수를 맞추게 된다.
해창주조장에서는 9도와 12도짜리 막걸리를 판매한다. 시중 막걸리와 비교하면 물을 거의 더하지 않아 진하면서도 부드럽다.
감미료 없이 찹쌀로 막걸리를 빚는 주조법은 오씨가 양조장을 인수한 뒤 개발한 방법이다.
그는 "감미료를 넣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당시로써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라며 "12도짜리 막걸리는 한 병에 1만1천원인데 재료비로 따지면 시중 일반 막걸리의 20배"라고 했다.
![해창 막걸리 [사진/전수영 기자]](https://img3.yna.co.kr/etc/inner/KR/2020/02/17/AKR20200217152800805_05_i_P4.jpg)
해창 막걸리 [사진/전수영 기자]
시음장으로 자리를 옮기니 오 대표가 12도 막걸리와 함께 15도와 18도 막걸리를 내왔다. 조만간 출시할 '해창 블루'(15도)와 '해창 롤스로이스'(18도)다.
해창 롤스로이스는 12도로 담근 막걸리에 고두밥과 누룩을 넣고 다시 한번 술을 빚기 때문에 총 두 달이 걸린다. 가격은 병당 11만원. '막걸리는 싼 술'이라는 인식을 깨는 고급 술이다.
해창 롤스로이스를 한 모금 맛봤다. 12도 막걸리보다 더 진하면서 18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점도가 높기 때문에 맑은 술과 달리 천천히 올라온다고 한다.
커다란 스피커가 놓인 시음장에서는 온종일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곳의 막걸리 역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익어간다.
"술을 만드는 것은 누룩 속 미생물들이에요. 저는 환경만 만들어 주죠. 음악도 미생물들 기분 좋아지라고 틀어주는 것이에요. 그래야 술맛도 좋아지니까요."
![해창주조장을 운영하는 오병인·박리아 씨 부부 [사진/전수영 기자]](https://img6.yna.co.kr/etc/inner/KR/2020/02/17/AKR20200217152800805_02_i_P4.jpg)
해창주조장을 운영하는 오병인·박리아 씨 부부 [사진/전수영 기자]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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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창주조장 전경 [사진/전수영 기자]](https://img9.yna.co.kr/etc/inner/KR/2020/02/17/AKR20200217152800805_01_i_P4.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