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삼동 패총과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발견된 조(粟)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재배 곡물의 하나로 꼽힌다. 방사성 탄소 연대에 따르면 기원전 약 3천500~2천년 무렵 이미 조가 재배됐다. 중국의 '시경'(詩經)과 '주례'(周禮)에도 조(稷)가 오곡(五穀)에 포함돼 있어 인류가 벼보다도 먼저 조를 길들였음을 보여준다.
척박한 토양과 가뭄에도 잘 자랐던 조는 실제로 고대 동북아에서 중요한 '구황 곡물'이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조는 오곡 중 으뜸으로 꼽혔고, 조선시대에는 농사의 기본이자 민생의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식생활이 바뀌면서 좁쌀은 점점 잊혀 갔다. 흰쌀밥이 풍요의 상징이 되자 노란 좁쌀은 가난의 표징이 됐고, '좁쌀 같다'는 말은 작고 하찮음을 뜻하게 됐다.
그러나 그 미세한 낟알 하나가 견뎌온 세월을 생각하면, 좁쌀은 전혀 작지 않다.
◇ 다양한 좁쌀의 종류
'조선요리제법'에는 '모인좁쌀죽'이 소개돼있다. 불린 좁쌀에 얼갈이배추를 넣고 푹 끓인 이 단출한 죽은 병든 몸을 달래고 허약한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웠다. 좁쌀 가루를 식초에 타 마시면 구토를 멎게 하고, 인삼과 함께 달이면 병후 회복에 좋다고 기록돼 있다.
차조와 메조는 찰성과 향에서 차이를 보인다. 차조는 찰기가 있어 밥·죽·떡에 쓰이고, 메조는 메말라 향이 강해 막걸리, 엿, 문배주, 가자미식해 등에 적합했다. 조선의 서민은 좁쌀을 엿으로 고아 아이들에게 먹이고, 껍질과 줄기는 땔감으로도 활용했다. 좁쌀 한 톨이 곧 생명의 단위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조의 맛이 담백하고 약간 짜며, 성질이 서늘해 신장을 보하고 허약을 보좌한다고 기록돼 있다. 본초습유(本草拾遺)는 좁쌀이 위를 편하게 하고 해독하며, 곽란·위통을 다스린다고 전한다.
또 신수본초(新修本草)에서는 조의 뜨물이 열과 갈증을 없애고 소갈(당뇨 증상)에 효능이 있다고 했다. 좁쌀이 구황 곡물만이 아니라 위장을 편하게 하고 체내 열을 내려주는 약재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차조는 성질이 약간 서늘하고 맛이 달며 위 열을 낮추고 진액을 보충한다. 메조는 기운을 북돋우고 혈액 순환을 돕는다. 약선학적으로 좁쌀은 '화중익기'(和中益氣)의 곡식으로 비장을 따뜻하게 하고 기를 더한다. 좁쌀의 식이섬유와 미량 성분인 베타글루칸(β-glucan)은 장내 유익균을 증가시키고 독소를 배출한다. 동의보감의 "곡식 중에는 그 성질을 따라 병을 낫게 한다"는 구절처럼, 좁쌀은 위장을 편히 하고 몸속 균형을 다스리는 곡식이다. 특히 위가 약하거나 쉽게 체하는 사람, 열이 많아 구역질이 잦은 이들에게 알맞다. 좁쌀죽은 소화가 잘되고 속을 따뜻하게 하며, 당뇨나 변비 증상 완화에도 도움이 된다.
좁쌀은 철분·마그네슘·칼륨이 풍부해 빈혈과 골다공증 예방에 좋다. 비타민 B1과 E가 많아 피로 해소와 세포 노화를 억제하며, 쌀보다 비타민 E는 약 3~5배 높다는 연구가 있다.(농촌진흥청, 2022)
단백질 함량도 쌀보다 높아 노인이나 회복기 환자에게 알맞다. 또한 낮은 혈당지수(GI 약 65)는 당뇨 환자에게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며, 탄수화물이 천천히 분해되어 포만감이 오래가므로 다이어트식으로도 권장된다.(국가표준식품성분표, 2021)
최근 좁쌀은 '좁쌀 차', '단호박차조죽', '좁쌀 수프' 등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좁쌀과 단호박을 함께 달이면 베타카로틴과 식이섬유가 어우러져 위를 따뜻하게 하고 피로를 풀어준다. 좁쌀에 산약(山藥)·대추를 넣은 죽은 비위를 보하고 면역력을 강화하며, 여름철에는 율무·적소두와 함께 끓이면 습열을 없애 준다.
좁쌀은 작은 알갱이지만 삶의 근본을 지탱하는 힘을 지닌다. 현대의학적으로는 장내 환경 개선, 혈당 조절, 항산화, 심혈관 보호에 효과가 있으며, 한의학적으로는 비위를 안정시키고 신장의 수기를 조절하여 음양의 균형을 잡는다.
좁쌀은 음식만이 아니라 한민족의 생명력이다. 가난과 흉년을 견딘 세대의 기억 속에서 좁쌀은 눈물과 함께 익었다. 어머니는 좁쌀죽을 끓이며 아이의 병을 달랬고, 조밥을 지으며 다음 해 풍년을 빌었다. 조선시대엔 가을 수확 뒤 좁쌀로 막걸리를 빚어 조상의 은덕에 감사했다. 좁쌀은 단단한 껍질 속에 겸손과 인내를 품은 곡식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싹을 틔워, 그 결실로 생명을 이어 왔다. 오늘 우리의 밥상에 좁쌀을 다시 올리는 일은 단지 건강의 선택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 문화를 되찾는 행위다.
◇ 손자병법으로 본 좁쌀 요리의 전략
손자병법 '지형 편'(地形篇)은 전쟁에서 지형을 파악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다룬다. 약선요리로 보면, 음식 재료의 성질을 알고 계절·체질·상황에 맞추는 조리처럼 해석할 수 있다. 좁쌀은 오곡 중에서도 '땅의 힘'을 가장 잘 담은 곡식이다. 황토와 바람, 가뭄에도 굴하지 않으니, 불리한 지형에서도 자신을 지켜내는 병사와 같다.
손자는 여섯 가지 지형, 통형·괘형·지형·애형·험형·원형지를 들었다. 이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좁쌀밥은 누구에게나 이로운 통형지(通形地)다. 흰쌀과 섞으면 소화가 잘되고 위장을 따뜻하게 해 피로를 푼다. 특별한 기술 없이도 균형을 이루는 평지의 병법이다.
좁쌀죽은 괘형지(卦形地)다. 병후 회복기나 노약자에게 유익하지만, 오래만 먹으면 허기를 느낄 수 있다. 대추·인삼·생강을 더하면 생명력이 배가된다. 후퇴와 재정비의 음식이다.
좁쌀전은 지형지(支形地), 즉 서로를 보완하는 땅이다. 채소·고기·두부 등을 섞어 부치면 밥상 조화를 이룬다. 이는 측면 지원군처럼 보조 전술의 음식이다.
좁쌀차는 애형지(隘形地), 즉 막힌 길을 여는 길목이다. 순환을 돕고 위를 편안히 하며 피로를 풀어준다. 노폐물과 막힘을 먼저 다스리는 선제공격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문배주는 험형지(險形地)에 해당한다. 좁쌀·배·누룩으로 빚은 증류주로, 강하면서도 맑다. 불과 물의 경계를 다루는 조리법답게 따뜻하되 과열되지 않는다.
좁쌀 막걸리는 원형지(遠形地)다. 병사에게 장기전의 식량인 셈으로, 발효 과정에서 유익균이 생겨 체력과 장 건강을 돕는다. 지속과 보급의 음식이다.
손자는 "지형을 아는 자는 사람을 얻고, 사람을 얻은 자는 승리를 얻는다"고 했다. 약선요리에서 지형은 체질·계절·환경의 조화다. 좁쌀은 어떤 땅에서도 싹을 틔우며, 사람의 몸속에서는 위장이라는 땅을 다스려 생명을 틔운다. 좁쌀을 아는 것은 땅을 아는 것이고, 그 땅의 이치를 먹는 일이다.
이것이 곧 좁쌀이 전하는 천년의 생명병법이다. 그야말로 K-푸드의 숨은 강자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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