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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근대의학 초석 '세브란스병원' 설립 에이비슨 탄생 160주년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근대의학 초석 '세브란스병원' 설립 에이비슨 탄생 160주년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를 설립한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올리버 에이비슨. [연세의료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서울에 서양식 의원과 진료소는 8개 있습니다. 의사 9명과 간호사 6∼7명이 이곳에 나뉘어 일하고 있습니다. 선교단체마다 병원을 각기 운영하다 보니 시설, 장비, 인력 등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힘을 합쳐 큰 병원을 짓고 의료인이 한데 모여 진료한다면 효과를 훨씬 높일 수 있습니다."

1900년 4월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서 올리버 에이비슨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의 연설에 감복한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는 에이비슨을 따로 만나 한국의 의료 실태와 병원 설립 계획을 꼼꼼히 물은 뒤 1만 달러를 기부했다. 지금의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천억 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오늘날 세브란스병원이 태동한 순간이었다.

1904년 서울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들어선 제중원병원(세브란스 기념병원)의 막바지 공사 모습. [연세의료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에이비슨은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났다가 6년 뒤 캐나다로 이주했다. 1884년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를 졸업하고 토론토대 의과대로 편입해 의사가 됐다. 모교 교수 겸 토론토 시장 주치의로 활동하던 중 1892년 선교 모임에서 만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권유를 받고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 신분으로 이듬해 조선으로 건너왔다.

어비신(魚丕信)이란 한국식 이름도 얻은 에이비슨은 1893년 11월 최초의 서양식 왕립(국립)병원 제중원(濟衆院)의 제4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예산 지원이 턱없이 부족해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가 없었다. 에이비슨이 "이럴 거면 차라리 병원을 우리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자 재정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에 운영권을 양도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제중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이승만은 단발을 자청했다. 언더우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이비슨이 이승만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을 담은 역사기록화. [연세의료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선교병원으로 탈바꿈한 제중원은 미국 북장로회 지원으로 사정이 나아졌다. 앞선 의술과 차별 없는 진료 덕분에 선교도 탄력을 받았다. 박성춘은 당시 노비보다 천대받던 백정이었는데, 에이비슨이 집에까지 찾아와 정성껏 치료해준 것에 감동했다. 그는 온 가족을 데리고 교회에 다닌 것은 물론 전도에도 앞장서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 탄생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제중원은 규모가 영세하다는 근본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에이비슨은 1899년 3월 캐나다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 후원자 물색에 나섰다. 친구인 건축가 헨리 고든에게서 설계도를 기증받은 뒤 세브란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세브란스는 에이비슨이 귀국 후 대지 마련에 어려움을 겪자 5천 달러를 더 보냈다.

제중원을 운영했던 서양 선교사 후손들이 2010년 4월 경기도 파주 SBS 드라마 '제중원' 촬영장을 찾아 박용우·연정훈·한혜진 등 주연 배우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이 올리버 에이비슨의 손녀 앤 에이비슨 블랙 여사다. [김종학프로덕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에이비슨은 남대문 밖 복숭아골(중구 도동), 지금의 서울역 앞 연세재단빌딩 자리에 40병상 규모의 제중원(세브란스 기념병원)을 새로 지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 건물에 입원실, 진찰실, 수술실, 실험실, 약국 등과 보일러, 증기탕 시설, X레이 촬영기, 압축공기 기구, 물리치료 기구 등을 갖춘 최신식 종합병원이었다.

1904년 9월 23일 봉헌식과 함께 정식으로 문을 연 데 이어 10월 4일 '빛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 백내장 환자를 수술했다. 1908년부터는 의학교 졸업생을 배출했다.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2010년 방송된 SBS TV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박용우 분)은 그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세브란스병원 신축 자금을 희사한 미국의 실업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연세의료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루이스 세브란스는 1876년부터 20년간 스탠더드 오일 회계책임자로 일했다. 사업과 주식 등으로 모은 돈을 해외 선교와 대학 등에 기부하면서도 그때마다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 돈"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에이비슨에게도 "받는 당신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큽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개원 후에도 세브란스병원에 3만 달러를 더 기부한 뒤 1913년 세상을 떠나며 아들 존에게도 세브란스병원을 도우라는 유언을 했다. 이를 지켜 아들도 1934년까지 20년간 12만4천500달러를 희사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생전에 존 세브란스 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돕고 있다. 이 사실은 2000년대 들어 미국 북장로회 명의의 실제 후원자를 추적한 세브란스병원 관계자에 의해 뒤늦게 밝혀졌다.

루이스 세브란스(가운데)는 1907년 한국을 방문해 3개월간 머물렀다. 오른쪽이 올리버 에이비슨이고 왼쪽은 세브란스의 주치의 러들로다. 러들로는 훗날 세브란스의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연세대 의대 박형우 교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에이비슨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을 겸하고 연희전문 전신인 조선기독학교 교장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캐나다장로회를 활용해 한국 상황을 해외에 알리는 한편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만나 유혈 진압에 항의하고 한국인에게 자치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부상자 보호와 치료, 사망자 위문 등에도 힘썼다.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고 선교사에서도 은퇴한 뒤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도 기독인친한회 재무를 맡아 한국을 돕는가 하면 한국 임시정부 승인과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했다.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고 1956년 미국 플로리다주 피터스버그에서 숨을 거뒀다. 아들 고든과 더글러스도 아버지를 따라 각각 농촌 계몽운동과 의료봉사에 헌신했다. 더글러스 에이비슨 부부는 서울 합정동 양화진묘지에 잠들어 있다.

연세대 공동설립자인 언더우드와 에이비슨 후손들이 2017년 4월 8일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열린 연세대 창립 132주년, 통합 6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세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는 1957년 연희전문과 합병해 연세대가 됐다. 두 학교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892년 에이비슨과 언더우드의 만남이 65년 만에 통합의 결실을 이룬 것이다. 현재 연세의료원은 서울 신촌과 강남, 경기도 용인, 강원도 원주 등을 합쳐 3천400병상 규모의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보건대학원, 간호대학원, 의과대, 치과대, 간호대 등의 교육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내일은 에이비슨 탄생 160주년 기념일이다. 에이비슨은 선교 목적으로 이 땅을 밟았지만 현대식 병원과 근대 의학교육의 뿌리를 내리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의 빛나는 성취 뒤에는 언더우드의 조언과 세브란스의 후원이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한민족의 힘으로만 이룬 게 아니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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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0-06-30 22:33:01     ▷작성자 : ■ SINCE-1999-신문-■ OTOT-오티오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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